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슐리외 추기경 (문단 편집) === 외치: [[정치현실주의|현실주의 대외정책]]의 선구자 === [[파일:external/www.romorantin.com/richelieu.jpg]] 리슐리외가 개신교(=[[위그노]])의 도시인 [[라로셸]]을 점령할 당시의 모습.[* 판금 갑옷에 [[추기경]]의 빨간 [[수단(의복)|수단]]을 두르고 있는 묘사는 강경한 무골이자 [[가톨릭]] 추기경이라는 두 정체성을 한번에 보여준다.] 라로셸 점령전에 직접 참전한 리슐리외는 해안 둑을 쌓아 잉글랜드의 지원을 차단했다. 나중에야 알았지만 이게 신의 한 수라고 볼 수 있는 것이, 먼 훗날 [[18세기]] [[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]]의 스페인은 잉글랜드의 지원을 대가로 지중해의 핵심 요충지인 지브롤터를 내주게 된다. 반면 리슐리외는 국내 갈등에 외국의 개입을 차단함으로써 프랑스가 이 꼴이 나는 것을 막은 셈이 된 것이다. 군대에 신경을 많이 쓰다보니, 군대에 대한 보급과 규율을 잡는것에 대해서도 각별히 관심을 가졌다. "역사를 통해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은 군대가 '''적이 아니라 물자 부족이나 무질서에 의해 파멸했다.''' 그리고 나는 이 시대의 모든 진취적인 모험들이 그러한 이치를 얼마나 망각했는지를 증언하고자 한다."라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. 리슐리외가 높게 평가되는 점은 바로 대외 정책으로, 당대 [[프랑스]]를 [[유럽]] 최강국의 위치에 올려놓고 대륙의 판도를 뒤바꿨다고 볼 수 있다. 덕분에 각국 궁정에서 '''강철발톱을 가진 이리'''라는 소리도 들었다. 그 자신이 가톨릭 고위 사제였음에도 [[30년 전쟁]] 당시 종교보다 세력 논리를 앞세워 개신교 진영을 지원, 참전한 것은 '''[[국가이성]](Raison d'État)'''의 대표적 사례로 인용되었고, 근대 이후 국제 정치에서 널리 통용되는 [[국가이익|국익]] 개념의 기원으로 평가받는다. 특히 그는 [[독일]]이 통일된 정치체제를 이룬다면 엄청난 [[독일제국|강]][[나치독일|적]]이 될 것임을 미리 직감하고[* 사실 예전에도 충분히 그럴 수 있으리란 건 누구나 알 수 있었을 것이다. 채 100년도 되기 전에 [[프랑스]]는 [[이탈리아]]의 패권을 둘러싼 [[합스부르크 제국]]과의 전쟁에서 여러 번 무참히 깨졌었다. 그 당시 합스부르크 제국은 [[스페인 제국]]과 [[동군연합]] + [[상속]]으로 인해 최대 판도를 자랑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해야겠지만 프랑스가 반쯤 사주한 오스만의 침공과 [[종교개혁]]으로 인한 [[신성 로마 제국]] 내부의 분열, 농민 반란, 스페인 귀족층의 반란 등의 악재가 겹치면서 큰 페널티를 받았다. 이런 페널티를 받고도 프랑스가 여러 번 깨지는 정도였는데 만약 독일의 세력들이 하나로 통합된다? 프랑스에겐 그야말로 끔찍한 시나리오였고, 실제로 후대에 이 점이 증명되었다.] [[합스부르크]] 세력을 견제하는데 힘썼다. 합스부르크 왕가가 [[스페인]]과 [[신성 로마 제국]]을 지배하게 되자, [[프랑스]]가 동서로 포위되는 것을 우려해서 합스부르크의 [[유럽]] 패권을 무너트리는데 평생을 바쳤으며, [[30년 전쟁]]에서는 ~~[[가톨릭]] [[추기경]] 주제에~~ [[개신교]] 국가들과 손을 잡고 물밑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. 종국에는 직접 참전하여 [[신성 로마 제국]], [[스페인]]과 사투를 벌였다. 결국 생전에는 그 성공을 보지 못했지만, 결과적으로는 [[합스부르크]] 왕가를 약화시키는데 성공했다. 여러모로 훗날의 [[오토 폰 비스마르크|비스마르크]]와 겹치는 부분이 많은 인물. 리슐리외의 대(對) [[독일]] 인식은 이후 [[프랑스]]가 [[알자스-로렌|알자스 전부와 로렌 일부]]를 집어삼키는 등 [[프랑스/외교]]정책에서 항상 중요한 기준점이 되었다. 그 덕에 [[독일]] 분열에 기여해서 [[나치 독일]]이나 [[아돌프 히틀러]]가 매우 증오하던 인물이라, [[1940년]] 프랑스를 점령할 당시 리슐리외의 무덤을 폭파시키려고 했다가 프랑스의 여론 반발이 커질 것이라고 측근들이 만류하여 그만둔 적도 있었다. 1642년 [[스페인]]과 [[전쟁]] 도중에 병으로 사망했다. [[합스부르크]] 왕가의 [[스페인]]을 매우 경계했기 때문인지, 죽어가는 데도 들것에 실려가면서 전쟁을 지휘했다. 사망하기 전, 리슐리외는 자신이 신임했던 [[쥘 마자랭]]을 자신의 후임자로 [[루이 13세]]에게 추천했으며, 많은 유산을 루이 13세에게 남겼다. 리슐리외가 살던 대저택이 오늘날에도 남아있는 [[팔레 루아얄]]로, 이때 부르봉 왕가의 재산이 되어 여기서 [[루이 14세]]가 성장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